제1회 고성 소가야 학술대회 개최

고성 소가야사 복원을 위한 첫 학술대회 ‘가야 고분군 학제간 연구과제’ 개최

고성군(군수 이상근)은 10월 8일 고성 송학동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하며 고성 소가야사 복원을 위해 기념비적인 첫 학술대회 ‘가야 고분군 학제간 연구과제’를 고성군 문화체육센터에서 개최하였다.


▲ 가야 고분군 학제간 연구과제 단체사진(고성군 제공)

이번 학술대회는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계기로 그동안 축적된 역사적, 고고학적 자료와 연구성과를 한자리에서 공유하고 향후 전반적인 소가야의 복원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학술대회는 최근 화제가 된 가야고분군 최대 규모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의 발굴조사 성과 보고를 시작으로 소가야 유적의 정비 방향 구상을 위해 소가야의 황금기에서 멸망까지 다루는 총 6개의 주제발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 김해박물관장 임학종을 좌장으로 하여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향후 경상남도 기념물인 만림산토성, 비지정 유산인 연당리 고분군 등의 조사와 정기적 학술대회 개최의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또 고성군에서는 국가유산청과 함께 오는 11월 7일에 고성 동외동 유적의 국가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그간 세간에 공개되지 못한 동외동 유적의 자료를 공유할 계획이다.


한편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은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가야 고분 중 최대 규모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고분의 규모는 남북 47.5m, 동서 53m, 높이 7.6m로, 지금까지 조사된 가야 고분 중 가장 크다. 조성 시기는 5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며, 이는 소가야 왕릉 조성 시점을 기존에 알려진 6세기 초중반보다 최소 50년 정도 앞당기는 중요한 발견이다.


14호분은 언덕 위에 3단에 걸쳐 봉분을 쌓은 형태로, 가장 높은 3단의 가운데 부분에 무덤 주인의 묘를 설치했다. 발굴 조사에서는 철기 유물과 토기 400여점이 출토되었다. 철기 유물로는 갑옷 한벌과 투구, 대도 4점, 살포 1점, 꺾쇠, 화살촉, 창날 등이 있으며, 가야, 왜, 백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토기는 대부분 전형적인 소가야 토기였으나, 왜계 원통형 토기도 출토되었다.


연당리 고분군은 소가야의 또 다른 중요한 유적지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에서는 소가야의 독특한 문화와 국제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소가야의 황금기는 5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송학동 14호분의 규모와 출토 유물을 통해 이 시기 소가야가 왜, 백제 등과 활발히 교류하는 해상왕국으로서 최전성기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소가야는 경남 고성을 중심으로 진해, 통영, 거제, 남해 등을 아우르는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가야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팽창과 백제의 약화로 인해 소가야는 점차 고립되기 시작했다. 특히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대패하면서 소가야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소가야의 정확한 멸망 시기는 문헌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56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소가야를 포함한 나머지 가야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소가야는 아마도 이 과정에서 신라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가야의 멸망 이후, 이 지역은 신라의 고자군(古自郡)이 되었다. 그러나 소가야의 문화와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지역의 문화적 기반으로 남아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 소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으며, 한국 고대사에서 소가야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재평가되고 있다.


고성군 관계자는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고성 소가야사 복원과 정비를 위한 기반자료 마련과 가능하다면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군민 모두에게 공유하고 소가야왕도 복원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며 소가야복원사업과 세계유산 등재에 군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했다.

[경남포스트]고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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